일본의 기무, 기리, 온 등은 우리말로 하면 의무, 신세, 은혜 정도가 될꺼다. 한국의 정서와 비슷하지만 많이 다르다.
<13계단>을 보면서 일본인들의 사고방식이 궁금해져 함께 읽었다. 역시 함께가 아니면 읽기 어려웠을 책이다. 다 읽고나니 <13계단>의 주인공과 그 여자친구, 주변인물들의 사고와 행동이 모두 이해된다. 주인공은 친구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하기보다 나의 기리가 훼손되었으므로 이에 대한 복수를 마치 정의실현인 것으로 생각한듯 하다. 이것은 작가의 사상이고, 일본인의 사상이다.
'인'이 빠진 유교사상, 절제를 위한 수행, 목숨보다 중요한 기리. 지배층의 필요에 의해 편리하게 각색된 사상들. 작은 일이라도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거기에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는 사람들, 자기절제를 미덕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일본인이다. 그래서 자기 계급에 충실하여 계급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나라가 일본이다. 나보다 그 자리를 중요하게 여기므로 자리에 만족하고 충성하는 반면, 어떤 사상으로 이용하기도 쉽다.
'명예'를 그렇게 중요하게 여긴 일본인들이 어찌 그리 조선을 잔인하게 다루었을까? '나쁘다'보다 '다르다'고 생각한다지만, 나쁘게 바라보고 싶다. 특히, <13계단>에서 주인공이 정의롭게 그려진 것이 '공감'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기리' 즉 자신의 명예에 기반한 것이라 생각하면 어이없다.
그들의 국민성으로는 자신들의 정의가 '전쟁'이라고 여겨진다면, 지배계급이 그렇게 여기도록 한다면, 언제든지 전쟁을 일으킬 수 있을 것 같다. 요즘 일본의 젊은이들은 많이 다르다고 하니 현대판 <국화와 칼>도 있으면 좋겠다. 미국인이 아닌 동양인, 혹은 한국인이 우리 정서와 비교해보는 것도 재밌겠다.
2차대전 끝 무렵 '일본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의 목적으로 일본에 한번도 가보지 않은 여성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가 쓴 책이다. 무려 70년전의 책이다. 70년 전 서양과 동양에서의 여성의 지위 차이가 새삼 느껴진다.
아래 기사는 흥미로워서 적어봅니다.
[주간조선 2446호, 2017.02.27]
[물음을 찾아 떠나는 고전 여행] 국화와 칼
히로히토는 왜 처벌되지 않았을까?
삼일절이다. 또다시 일본을 생각해 본다. 모든 전쟁에서 패전국의 수뇌는 가혹한 처벌을 면치 못하게 마련이다. 2차대전의 원흉인 히틀러나 무솔리니도 자살 또는 타살로 생을 마감했다. 반면 히로히토(裕仁)는 개인적 안전뿐만 아니라 대대손손 영속까지 보장되었다.
이처럼 승전국인 미국은 그를 단순한 전범으로 처분하지 않고 ‘특별한’ 존재로 처우했다. 당시 이러한 미국 측 대응과 판단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진 고전이 있다. 바로 루스 베네딕트(1887~1948)의 ‘국화와 칼’(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1946)이다.
중략
우리는 일본이 진솔한 반성을 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들은 역사와 선조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온’을 망각하고 ‘기리’을 저버리는 짓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 비추어, 위안부 문제만 해도 우리의 대응이 얼마나 어설픈지 알 수 있다. 그것은 섣불리 외교 현안으로 삼을 일이 아니다. 더구나 단숨에 해결할 일은 더더욱 아니다. 단언컨대 지일(知日)이 없으면 극일(克日)도 없다. ‘국화와 칼’이야말로 더없이 좋은 지일 교과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