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육가설'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8.07.18 [영화] 케빈에 대하여
  2. 2017.02.25 [책]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 수 클리볼드
posted by 별진 2018. 7. 18. 23:04

<케빈에 대하여>를 보고 토론을 했다. 
틸다 스윈튼의 넋빠진 얼굴, 에즈라 밀러의 냉소적인 미소가 압권이다. 끔찍한 장면 없이 깔끔하게 많은 것을 보여주는 영화다. 멋지다. 
 
영화를 선정한 후 어떤 분은 애착관계에 대한 글을 보내셨고, 토론중 어떤 분은 케빈의 냉소에 기막혀 했다. 나는 모두 불편하다. 한 인격체의 형성에 대해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얼마나 될까? 일반적인 애착관계에 대한 설명들은 부모, 특히 엄마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진다. 

케빈의 냉소는 그 아이의 진짜 속마음이라기 보다 표현방법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케빈은 아직 어린 아이고, 엄마의 사랑에 대한 집착으로 속마음과는 반대되는 반항적인 표현을 하는거다. 이혼이야기 장면에서 케빈의 두려움 가득한 얼굴, 경찰차에서 끌려가면서 뒤돌아보는 공포에 휩싸인 얼굴, 교도소에서의 슬픈 얼굴 등이 케빈의 진짜 얼굴이다. 

케빈의 냉소도 무감하게 그려지는 에바때문이라고들 한다. 원하지 않는 임신과 육아에 지친 에바에게 휴식처는 없었다. 에바가 어떻게 무엇을 더 할 수 있었을까? 에바가 더할나위 없이 사랑으로 가득찬 엄마였다면 달랐을까? 에바는 그냥 보통 엄마다. 지독하게 운이 나쁜 엄마. 시간을 되돌린다면 그녀가 엄청난 희생과 사랑으로 케빈을 돌볼 수 있었을까? 엄마는 신이 아니다. 자신의 욕구가 있는 평범한 인간이다.

"Do not resist" 
케빈을 낳을때 산부인과 의사가 한 말이다. 저항하지 말라니.
영화를 보고 엄마의 모성애 결여가 잘못되었다고, 애착관계가 잘못 형성되어서 아이가 사이코패스가 되었다고 하는 해석이 많았다. 영화는 무책임하다. 해석을 모두 이렇게 맡겨버리다니. 나도 때때로 아이가 미울때가 있다. 그럴때면 '나는 엄마니까' '엄마가 그런소리 하면 안되지' 하며 다잡는다. 이건 모성본능일까? 아니면 학습된 모성일까?

싸이코패스, 소시오패스는 엄마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의 예를 들었더니, 저자가 후회하는 부분을 이야기 하신다. 과거로 거슬러 가면 원인이 될만한 모든 것들을 예방하고 제거할 수 있을까?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 다만 그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 최선이라는 것 역시 집착하고 매달려서 애쓰는 것보다 순간순간 할 수 있는 것들을 할 뿐이다. 

조금은 진보적인 사고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던 분들의 뿌리깊은 모성본능에 대한 사고에 조금 화가 난다. 내가 옳다고 주장하고 싶었다. 양육가설을 읽고 주장하고 싶어졌다. 이것도 600페이지가 넘는데 빌리고 말았다. 책이 너무 깨끗해서 실망이다. 


  







posted by 별진 2017. 2. 25. 00:47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식을 나누어주고 발신추적전화기를 달아주고 심지어 꽃을 심어주는 이웃들과 직장동료들이었다. 타인에게 간섭하지 않는 개인주의적 성향이 사건당사자의 부모라도 객관화 할수 있는 이성을 발휘하게 하고 배려하게 하는 힘이 될수 있다는게 놀라웠다. 한편으로는 나는 어떤 이웃인가 반성도 했다. 미국사회에서 이웃간의 교류가 우리나라보다 더  가족적이고 따뜻하지 않나 생각되기도 한다. 이런 배려와 자살방지센터 같은 시스템은 참 부러웠다.


읽으면서 이제 친구관계를 많이 맺기 시작한 아들이 걱정되기도 했다. 중학교 시절 거절하지 못한 친구의 제안때문에 상처입은 적이 있는데, 이런 우유부단함을 닮아서 힘들까 걱정되었다. 딜런이 에릭의 전화에 엄마핑계를 댔던 점, 에릭의 분노, 하지만 나중엔 잘 지냈고 친구들도 많았는데 세상 어느 부모들이 문제를 알 수 있었을까? 마지막에 설교하기 보다 귀를 기울였더라면 좋았겠다는 글이 가슴을 울린다.


뇌의 병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다 알았고 그들에 대한 편견을 걷어내었다. 일상적인 나의 편견들도 돌아보았다. 직업, 맞벌이, 이웃들, 친구들, 어른들, 종교 등에 대한 단편적인 부분만으로 수많은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내가 부끄럽기도 했다.


글쓴이가 끊임없이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위로하는 마음은 정말이지 존경스럽다. 어려움 속에서도 사람들안으로 직장으로 여러센터 속으로 들어가 고군분투하고 자신을 돌아보고 딜런과 더불어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그녀의 정신력은 정말 경이로웠다.


책 뒷부분에 설교보다 귀를 기울였더라면, 감정을 달래기 보다 인정해주었더라면, 걱정된다고 끈덕지게 말하고, 다 버리고 아이에게 집중했더라면 하는 지은이의 말이 참 가슴 아프다. 오늘도 설교를 수없이 한 내 모습이 한심했다. 귀 기울이고 감정을 인정해주기만 해도 아이는 훨씬 편안할 것 같다.


옮긴이의 말에서 
주디스 리치 해리스의 [양육가설]에 대해서 나온다.

"부모는 아이의 성격이 결정되는 데 별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아이들은 집 밖에서 또래들과 함께하는 환경 속에서 사회화되고 성격을 형성한다고 주장하는 책이다. 이 책은 육아의 책임을 가정에서 학교, 사회로 확장시켰다는 점에서 특히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아이는 혼자 키우는 게 아니라 사회가 다같이 키운다고 생각하면 불안과 경쟁을 조장하는 사회 속에서 이기적인 육아에 빠지지 않고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못된 내 성질이 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니 안심이 되기도 하고, 한편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곳에서 사회화 되고 성격이 형성된다니 더 불안하기도 하다. 하지만 중요한 부분은 공동체이고 이웃이다. 내가 먼저 보듬어주고 배려하고 따뜻한 이웃이 되어야 한다. 많이 애쓰지 않고, 마음 나는대로, 바라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