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별진 2019. 4. 26. 01:00

#국화와칼 

#13계단 #스포있습니다

 

일본의 기무, 기리, 온 등은 우리말로 하면 의무, 신세, 은혜 정도가 될꺼다. 한국의 정서와 비슷하지만 많이 다르다.

 

<13계단>을 보면서 일본인들의 사고방식이 궁금해져 함께 읽었다. 역시 함께가 아니면 읽기 어려웠을 책이다. 다 읽고나니 <13계단>의 주인공과 그 여자친구, 주변인물들의 사고와 행동이 모두 이해된다. 주인공은 친구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하기보다 나의 기리가 훼손되었으므로 이에 대한 복수를 마치 정의실현인 것으로 생각한듯 하다. 이것은 작가의 사상이고, 일본인의 사상이다.

 

'인'이 빠진 유교사상, 절제를 위한 수행, 목숨보다 중요한 기리. 지배층의 필요에 의해 편리하게 각색된 사상들. 작은 일이라도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거기에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는 사람들, 자기절제를 미덕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일본인이다. 그래서 자기 계급에 충실하여 계급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나라가 일본이다. 나보다 그 자리를 중요하게 여기므로 자리에 만족하고 충성하는 반면, 어떤 사상으로 이용하기도 쉽다. 

 

'명예'를 그렇게 중요하게 여긴 일본인들이 어찌 그리 조선을 잔인하게 다루었을까? '나쁘다'보다 '다르다'고 생각한다지만, 나쁘게 바라보고 싶다. 특히, <13계단>에서 주인공이 정의롭게 그려진 것이 '공감'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기리' 즉 자신의 명예에 기반한 것이라 생각하면 어이없다. 

 

그들의 국민성으로는 자신들의 정의가 '전쟁'이라고 여겨진다면, 지배계급이 그렇게 여기도록 한다면, 언제든지 전쟁을 일으킬 수 있을 것 같다. 요즘 일본의 젊은이들은 많이 다르다고 하니 현대판 <국화와 칼>도 있으면 좋겠다. 미국인이 아닌 동양인, 혹은 한국인이 우리 정서와 비교해보는 것도 재밌겠다.

 

2차대전 끝 무렵 '일본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의 목적으로 일본에 한번도 가보지 않은 여성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가 쓴 책이다. 무려 70년전의 책이다. 70년 전 서양과 동양에서의 여성의 지위 차이가 새삼 느껴진다. 

아래 기사는 흥미로워서 적어봅니다.

 

[주간조선 2446호, 2017.02.27]

[물음을 찾아 떠나는 고전 여행] 국화와 칼

 

히로히토는 왜 처벌되지 않았을까?

 

삼일절이다. 또다시 일본을 생각해 본다. 모든 전쟁에서 패전국의 수뇌는 가혹한 처벌을 면치 못하게 마련이다. 2차대전의 원흉인 히틀러나 무솔리니도 자살 또는 타살로 생을 마감했다. 반면 히로히토(裕仁)는 개인적 안전뿐만 아니라 대대손손 영속까지 보장되었다.

 

이처럼 승전국인 미국은 그를 단순한 전범으로 처분하지 않고 ‘특별한’ 존재로 처우했다. 당시 이러한 미국 측 대응과 판단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진 고전이 있다. 바로 루스 베네딕트(1887~1948)의 ‘국화와 칼’(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1946)이다.

 

중략

 

우리는 일본이 진솔한 반성을 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들은 역사와 선조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온’을 망각하고 ‘기리’을 저버리는 짓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 비추어, 위안부 문제만 해도 우리의 대응이 얼마나 어설픈지 알 수 있다. 그것은 섣불리 외교 현안으로 삼을 일이 아니다. 더구나 단숨에 해결할 일은 더더욱 아니다. 단언컨대 지일(知日)이 없으면 극일(克日)도 없다. ‘국화와 칼’이야말로 더없이 좋은 지일 교과서이다.

 

#역사는반복된다니_두렵습니다

#수행은_그런게아냐 #공감하는_한국인

#나쁘다말고_다르다 #머리보다_가슴으로

#용기내어_올려봅니다.

 

posted by 별진 2019. 1. 8. 23:53

혼자서는 보지 못했을 책이다.지인의 뽐뿌질이 아니었으면 완독하지 못했을 것이다. 완독하지 못했으면 감동도 없었을 것이다.


"그 어느 것도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은 없었다. 그 모든 일이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짜여진 운명에 상응하는 것이었으며, 에스테반 가르시아도 그 일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거칠고 삐뚤어진 부분이었지만, 그 어느 것도 괜히 존재하는 것은 없었다. "


"인생은 너무 짧고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 버려서 우리는 사건들 간의 관계를 제대로 관망하지 못한다고 내가 썼고 , 그녀도 그렇게 썼다. 우리는 자신이 저지른 행동의 결과를 예측하지 못하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의 환상을 믿고 있다. "


단어들의 깊이가 우주같이 느껴진다. 수백년을 살아온 단어들의 연륜이 와닿는다. 우리근대사와 비슷한 칠레의 역사를 통해 저마다의 상황을 살아내는 사람들이 모두 이해가 되는 책이다. 나와 비슷한 나이에 작가는 삶과 시대를 통찰한듯 하다. 작가들은 모두 천재인가보다. 이분은 거기에 영혼을 더했다.


#영혼의집 #이사벨아옌데
#이것은스포입니다 #연기법입니다 #재미도있어요
#고독을이해하게됩니다 #미국은이해하기어렵습니다
#알수록감동이커집니다 #삶을관망할수있을까요
#방학이라너무좋아요

이미지: 사람 1명, 실내


posted by 별진 2018. 7. 18. 23:18



p.256
트라이애슬론 체형. 우리는 초가을 일요일의 소박한 레이스를 끝내고 각자의 집으로,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리고 다음 레이스를 대비해 각자의 장소에서 이제까지와 같이 묵묵히 연습을 계속해간다. 그런 인생을 옆에서 바라보면 별다른 의미도 없는 더 없이 무익한 것으로서, 또는 매우 효율이 좋지 않은 것으로서 비쳐진다고 해도, 또한 어쩔수 없는 일이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한다. 가령 그것이 실제로 바닥에 작은 구멍이 뚫린 낡은 냄비에 물을 붓는 것과 같은 허망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적어도 노력을 했다는 사실은 남는다. 효능이 있든 없든, 멋이 있든 없든, 결국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대부분의 경우, 눈에는 보이지 않는(그러나 마음으로는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진정으로 가치가 있는 것은 때때로 효율이 나쁜 행위를 통해서만이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공허한 행위가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어리석은 행위는 아닐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실감으로써, 그리고 경험칙으로써.

*하루키의 말이 편안하다. 작가의 삶의 태도인 것이다. 효율이 없어도 얻는 것이 없어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어쩔수 없다는 것은 단념이나 체념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그저 사는 것. 그 안에서 노력이란 것을 해보는 것. 거기서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얻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괜찮은 것이다. 

posted by 별진 2018. 7. 18. 23:04

<케빈에 대하여>를 보고 토론을 했다. 
틸다 스윈튼의 넋빠진 얼굴, 에즈라 밀러의 냉소적인 미소가 압권이다. 끔찍한 장면 없이 깔끔하게 많은 것을 보여주는 영화다. 멋지다. 
 
영화를 선정한 후 어떤 분은 애착관계에 대한 글을 보내셨고, 토론중 어떤 분은 케빈의 냉소에 기막혀 했다. 나는 모두 불편하다. 한 인격체의 형성에 대해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얼마나 될까? 일반적인 애착관계에 대한 설명들은 부모, 특히 엄마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진다. 

케빈의 냉소는 그 아이의 진짜 속마음이라기 보다 표현방법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케빈은 아직 어린 아이고, 엄마의 사랑에 대한 집착으로 속마음과는 반대되는 반항적인 표현을 하는거다. 이혼이야기 장면에서 케빈의 두려움 가득한 얼굴, 경찰차에서 끌려가면서 뒤돌아보는 공포에 휩싸인 얼굴, 교도소에서의 슬픈 얼굴 등이 케빈의 진짜 얼굴이다. 

케빈의 냉소도 무감하게 그려지는 에바때문이라고들 한다. 원하지 않는 임신과 육아에 지친 에바에게 휴식처는 없었다. 에바가 어떻게 무엇을 더 할 수 있었을까? 에바가 더할나위 없이 사랑으로 가득찬 엄마였다면 달랐을까? 에바는 그냥 보통 엄마다. 지독하게 운이 나쁜 엄마. 시간을 되돌린다면 그녀가 엄청난 희생과 사랑으로 케빈을 돌볼 수 있었을까? 엄마는 신이 아니다. 자신의 욕구가 있는 평범한 인간이다.

"Do not resist" 
케빈을 낳을때 산부인과 의사가 한 말이다. 저항하지 말라니.
영화를 보고 엄마의 모성애 결여가 잘못되었다고, 애착관계가 잘못 형성되어서 아이가 사이코패스가 되었다고 하는 해석이 많았다. 영화는 무책임하다. 해석을 모두 이렇게 맡겨버리다니. 나도 때때로 아이가 미울때가 있다. 그럴때면 '나는 엄마니까' '엄마가 그런소리 하면 안되지' 하며 다잡는다. 이건 모성본능일까? 아니면 학습된 모성일까?

싸이코패스, 소시오패스는 엄마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의 예를 들었더니, 저자가 후회하는 부분을 이야기 하신다. 과거로 거슬러 가면 원인이 될만한 모든 것들을 예방하고 제거할 수 있을까?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 다만 그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 최선이라는 것 역시 집착하고 매달려서 애쓰는 것보다 순간순간 할 수 있는 것들을 할 뿐이다. 

조금은 진보적인 사고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던 분들의 뿌리깊은 모성본능에 대한 사고에 조금 화가 난다. 내가 옳다고 주장하고 싶었다. 양육가설을 읽고 주장하고 싶어졌다. 이것도 600페이지가 넘는데 빌리고 말았다. 책이 너무 깨끗해서 실망이다. 


  







posted by 별진 2018. 5. 24. 09:41

힐링책인줄 알았다. 목차만으로도 책이되고, 제도와 정치는 생활이라는 것을 알게하는 책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읽으면 좋겠다. 

  • 말하지 못한 상처, 기억하는 몸
  • 누군가는 그들 편에 서야 한다.
  • 사회적 고통을 사회적으로 치유하려면 
  • 쏟아지는 비를 멈추게 할 수 없다면, 함께 그 비를 맞아야 한다
  • 당신의 공동체는 안녕하신지요


저자의 깊은 고민과 성찰, 솔직함에 감동이다. '이상한 정상가족'에 이어 나의 불안감의 근원을 알 수 있었고 그래서 속시원하기도 한 책이다. 기득권자 중에도 쏟아지는 비를 함께 맞아주는 이가 있다니 희망을 갖게 한다. 크던 작던, 탄탄하던 느슨하던 지금 내 주변의 공동체, 공동체가 될 수 있는 것들을 챙겨야겠다. 그리고 삶을 즐기자.

p.15 

사회적 폭력에 노출된 약자들은 자신의 경험을 표현할 적절한 언어를 가지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차별을 경험해도, 과연 자신의 경험이 차별이었는지 판단하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p.21
차별을 경험하는 것Experienced discrimination, 그 경험을 차별이라고 인지하는 것Perceived discrimination, 그 인지한 차별을 보고하는 것Reported discrimination을 구분해야 한다

p. 131
* 전공의의 과로에 대해서 연구한 것을 보면서, 지역적으로 강남3구와 타 지역 주민들의 정신건강 상태에 대해서 연구해보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특히 초등고학년과 고등학생 아이를 둔 학부모들의 심리상태는 어떻게 다를지 조사해보면 흥미롭겠다 싶다. 아이 연령대와 관계없이 어린이집부터 대학입학때 까지 학령기의 아이를 둔 가정은 모두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듯 하다. 아이가 공부를 잘 해야 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텐데, 엄청난 교육비를 계속 감당할 수 있어야 할텐데 하는 불안감이다. '이상한 정상가족'에서 봤듯이 어느 것이던 한번 삐끗하면 모든 가족이 고통을 감내해야 하고 사회 안전망은 없다. 

* 전공의 A가 자살하고 유가족이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는 이야기에 '용감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게 병원에 소송을 할 만한 것인지 판단하지 못했을 것이고, 스스로 자신의 건강을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꺼다. 귀책사유는 본인에게 있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환경이, 그 사회의 분위기가 이의를 제기할 만하지 않다면 그 귀책사유는 개인보다는 첫째로 시스템에 있는 것이다. 약자로서 해내야 하는 지루한 싸움에 지레 겁먹었을 거고, 두려워했을 꺼다. 이기리라는 의욕을 불사르지도 못했을 거고, 시작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걱정부터 했을거다. 


p.167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트라우마에 대하여

* 나의 경우 트라우마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것이 최근까지는 내 안에서 해석되고 재생산되어 과대망상적 피해의식으로 있다가, 최근 미투나 <며느리 사표>등 여러 사회 분위기 덕분에 조금씩 밖으로 노출되고 있는 듯 하다. 

* 정신적 스트레스, 트라우마에 대하여 약물치료, 인지치료등은 사건의 원인과 경로를 파헤치고 돌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흐릿하게 만들 수 있다는데 동의한다. 이는 내면으로 더욱 감추는 결과를 만들어 유발인자가 나타나면 폭발할 수 있는 것이다. 

p.225
"공동체의 수준은 한 사회에서 모든 혜택의 사각지대에 놓인 취약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고요"

p.265
내가 속한 공동체가 나를 보호해줄 수 있다는 확신, 내가 위기에 처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함께 해줄 것이라는 확신은 기꺼이 힘겨운 삶을 꾸려나가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posted by 별진 2018. 5. 7. 23:23
방심(放心)


                                                                                    - 손택수

                              한낮 대청마루에 누워 앞뒤 문을 열어
                              놓고 있다가, 앞뒤 문으로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에 겨드랑 땀을 식히고 있다가,

                              스윽, 제비 한마리가,
                              집을 관통했다

                              그 하얀 아랫배,
                              내 낯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한순간에,
                              스쳐지나가버렸다

                              집이 잠시 어안이 벙벙
                              그야말로 무방비로
                              앞뒤로 뻥
                              뚫려버린 순간,

                              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이
                              사립문을 빠져 나가는 게 보였다 내 몸의
                              숨구멍이란 숨구멍을 모두 확 열어젖히고

                                                                                   (2006년)


개운하다. 늘 맘 졸이며 불안을 안고 사는 요즘 사람들에게 이런 경험이 있을까? 정해진 일들을 정해진 시간안에 해내는 데에 익숙해진 사람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무언가를 해야 맘 편한 사람들. 오죽하면 " 멍때리기 대회" 가 있을까.

"그 하얀 아랫배", "내 낯바닥" 이 "닿을 듯 말 듯" 한 순간을 나도 경험해본지 오래되었다. 애, 어른 할 것 없이 아슬아슬한 경험들을 미리 차단하고 이러저러한 준비를 한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미리 한글을 깨치고, 여러가지를 경험하고 배우게 하고, 사람들과의 관계속에도 "내 낯바닥"을 먼저 보이지 않으려 애쓴다.

지식적이고 정서적인 "낯바닥" 뿐만 아니라, 물리적으로도 "낯바닥"을 드러내지 않는 요즘의 생활이다. 몸으로 일하고 경험하던 과거에는 몸으로 "낯바닥"이 드러나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어릴적 개울가에 몸을 담궜는데 차가워서 깜짝 놀랐던 느낌이 생각난다. 대학시절 태안 친구집 생강밭에서 한시간여 일한 후의 낮잠과 된장찌개뿐이던 점심밥의 달콤함에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숨구멍이 모두 확 열어젖혀지는 경험".

때로 준비없이 맞딱뜨리게 되는 순간들을 숨구멍을 열고 기대해도 괜찮을것 같다. 어릴때 외할머니 집에서 바닷가에 다녀온 후 사촌들과 낮잠잤던 것이 생각난다.  내 아이는 이런 느낌을 경험했을까? 알기는 할까? 일상에서 모든 것에 방심해도 괜찮기를, 자유롭기를.


posted by 별진 2018. 5. 5. 23:44
fable 02 불행한 소년
 가장 슬프고 우울한 이야기였다. 불행한 소년이 계속 불행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개인의 이유가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다. 그래도 착하고 성실하면 먹고사니즘을 보장해줘야 하는 것이 시스템이다. 

fable 06 용을 잡는 사냥꾼
어떤것이 바른길 혹은 행복한 길인가? 모두가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을 해야 하는 걸까? 가치있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사냥꾼이 말하는 실수와 후회는 무엇일까? 각자의 자리에서 지금 괜찮으면 되지 않을까? 길가에 풀처럼 살아라 한다. 풀도 꽃도 되기가 참 어렵다. 

fable 07 농장의 일꾼들
얼마전 읽은 시사IN 기사 중 '공정이란 무엇인가?' 문재인 정부의 공정 역습 기사와 최저시급 문제가 생각난다. 최저시급을 주고 인력을 고용할 수 있는 고용주들은 분명 고용자보다는 더 가져가고 있지만 최저시급이 오르니 다들 앓는 소리를 한다. 당장 우리도 그랬다. 

fable 15 냄비속의 개구리
 나는, 내 아이는 개구리가 안되면 좋겠다! 나를 잘 알고, 환경을 잘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를. 그래서 불편함에 대하여 말할 수 있기를. 스스로 불편함을 벗어날 수 있는 용기를 갖기를. 

fable 18 까마귀
. 지금 내가 가는 길이 까마귀가 가는 길이진 않을까? 영어공부를 하고 책을 읽고 일을 하고 더 나은 일과 보수를 추구하고 체면을 지키고 명예를 갖고 싶은 이 욕망이 내 분수를 모르고 꾀꼬리가 되려고 더 나아가 공작새가 되려고 허세를 부리는 것은 아닐까? 고미숙 작가의 책이 생각난다. 산업혁명 이전에는 노동이 놀이같은 것이었다고. 노동요를 부르면서 다함께 하는 노동이 고단하지만 놀이였다고 한다. 산업혁명 이후로 사람들은 편리해졌다고 생각하지만 노동시간은 점점 길어졌고 삶의 여유는 줄었다고 말한다. 

"전에는 먹고 노닥거리는 사이 짬을 내어 몸을 꾸몄지만 이제는 몸을 꾸미는 사이 짬을 내어 먹이를 찾아 먹어야 했다." 

지금은 건강을 위해서 운동도 시간을 내서 노력해야 하는 시대이다. 정말 사람들은 마냥 즐겁게 운동하는 걸까? 그냥 퍼져서 놀아도 되는데 운동이라는 노동을 즐겁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겉모습 뿐만 아니라 더 가지기 위해, 가진것을 지키기 위해 노닥거리지 못하고 허상을 쫓는 것은 아닐까?

fable 19 팔없는 원숭이
 노오력! 그리고 시스템의 문제. 

fable 20 숲
 "그렇게, 모두가 자기만을 위해 살면서도 모두를 위해 살았다."
 경쟁사회. 지금도 이미 그 아래는 시커멓게 멍들어 햇볓을 받지 못한다. <2120년에서 친구가 찾아왔다> 에서 미래의 모습을 안전한 부자들의 성벽이 있는 부자 돔 동네와 천민구역으로 나뉘어 서로 경계밖은 위험해서 다니지 못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 생각난다. 


posted by 별진 2018. 4. 20. 23:04

http://aladin.kr/p/fntRD


한달음에 다 읽어버렸다. 

막연하게 불편했던 일들이 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임을 인지하게 되었다. 아이에 대한 부모의 권리는 권리가 아니라 의무임을, 아이들도 굴욕과 모욕을 당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아이의 시선으로 다시 알게 된다. 매일 학교에서 5시간 이상의 학습노동을 하고 오는 아이에게 다시 문제집을 풀라고 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인가를 다시 생각해본다. 


얼음 탄 사이다!


p.36

부모의 체벌에도 불구하고 나는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고 말해야 한다.


p. 57

한국의 헌법에 해당하는 <독일기본법> 은 " 자녀의 보호와 교양은 자연적 권리이자 일차적으로 부모에게 부과되는 의무이다. 그의 행사에 관하여는 국가 공동체가 감독한다"라고 정하고 있다. 

부모의 자녀에 대한 권리는 부모의 자유권이라기보다 자녀의 보호를 위해 부여되는 기본권으로 권리보다는 의무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p.100
중국의 경우 확대가족이 있어 아동학대 빈도가 적다는 저자의 이야기. 

* 아동학대는 가족의 형태보다 사회적 환경과 더 깊숙이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경우 '아동 살해 후 부모자살'이 한국, 일본보다 적다는 것이 확대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10여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독박육아를 하는 나로써도 맘충일수밖에 없었고, 겨우 4시간 일하는 파트타임에도 종종거릴 수 밖에 없는게 현실이다. 남편의 동반적 공동체의식의 결여를 제쳐두고라도 공동체라고 할 만한 것들이 주변에 없다. 게다가 뿌리깊은 가부장의식을 경험해온 나는 성인임에도 양가부모에 얽매이는것이 싫어서 확대가족을 가까운 공동체로 두기는 더욱 두렵다. 

p.162

다른 나라에서도 가정, 가족이 매우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한국과 차이점은 다양한 공동체와 시스템의 존재여부에 있다. 한국은 핵가족에 더하면 조손가족 정도이고 그 외에 다른 형태의 공동체라 할 만한 것이 없다. 미국이나 프랑스 등은 다양한 사회시스템으로부터 보호받는 듯이 보인다. 얼마전 본 줄리언 반스 원작의 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에서도 보면 엄마, 아버지는 이혼상태이고, 미혼모인 딸이 학업을 병행하며 혼자 아이를 낳지만 출산 전 후로 여러 시스템에서 도움을 받는다.


p.181

한국사회에서는 개인이 아니라 가족이 경쟁단위다.

사회적 안전망이라곤 찾으려야 찾을 수 없는 상태에서 개인을 보호하는 유일한 안전망은 혈연 및 직계가족뿐이었다. 


p.199

우리가 이토록 각박해진 이유는 흔히들 말하는 가족 해체, 개인주의화 때문이 아니라 배타적 가족주의에서 비롯된 차별과 혐오의 영향이 가장 크다고 나는 생각한다. 


p.229

스웨덴의 경우....

정책의 우선순위는 일과 육아의 충돌에서 발생하는 부모의 스트레스를 줄이고 아이를 건강하게 양육하는 데에 두어졌다. 부모가 일과 양육 중 하나를 선택할 필요가 없으니 아이들도 부모에게 부담이나 경제적 곤란, 스트레스의 원천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p.236

대전의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어린 아이들은요, 외로움을 좀 잘 느껴가지고, 사회적으로도 어른들을 늦게까지 이렇게 막 회사에 잡아놓거나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가족들하고 같이 오래 있을 수 있게."


p.252
공감이란 "자신의 테두리 밖으로 살짝 나와서 여행하는 일, 자신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멀고도 가까운> - 리베카 솔닛

p.256
핑거가 '네 이웃과 적을 사랑하라'보다 더 낫다고 추천한 이상은 다음과 같다.
"네 이웃과 적을 죽이지 마라. 설령 그들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정책과 규범이라야 한다. 


posted by 별진 2018. 4. 14. 00:11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60530




"Olive is the Olive!"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다. 

마치 "시크릿"같은 책을 쓰고 강의를 하는 아빠, 묵언수행을 하는 고딩 오빠, 마약쟁이 할아버지, 자살을 시도한 외삼촌, 그리고 안경쓰고 동그란 7살 귀여운 올리브가 있다. 

아빠가 올리브에게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살찐다고 이야기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나도 민제에게 그러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본다. 내가 한동안 빠져있던 책, "시크릿"  같은 강의를 하고 winner 라고 생각하고 포기하지 않으면 winner 가 된다는 아빠, 그 덕분에 올리브는 아이스크림도 맘편히 못먹고 loser가 되길 두려워한다. 

올리브가 할아버지에게 묻는다. 
"나는 loser가 되고 싶지 않아요."
할아버지가 말한다.
"그런 생각은 대체 어떻게 한거니? 진짜 loser는 loser가 되길 두려워하는 사람이란다."

뭐든 노오력해야 한다고, 거기에 법당에서 들은 '애쓰지 않고 그냥 하면 돼' 까지 더해져서 민제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아니, 법당에서 들은 주옥같은 법문들은 차원이 다르지만 내가 그것을 잘못 적용시키고 있을때가 가끔 있다. 민제가 숙제를 안했을때 화내면서 이야기하면 그렇게 되는 거다. 

올리브가 미인대회에 나가서 소위 '더러운' 춤을 추지만, 진하게 화장하고 인형처럼 꾸미고 어른들마냥 가식적인 미소와 포즈로 무대를 누비는 아이들은 깨끗할가? 미인대회의 본질이 깨끗함, 순수함과는 거리가 멀다. 사회자의 반질한 얼굴과 바비인형 같은 심사위원들을 보라. 올리브와 할아버지는 좋아하는 춤을 췄을 뿐이다. 거기에 이상한 상상을 더한 것은 더럽다고 이야기하는 바로 그 사람들이다. 

삶이란 씽씽 잘 달리는 자동차보다 다함께 고장난 버스를 밀어 함께 가는 것이다.
posted by 별진 2018. 1. 31. 15:11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마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튀기지 마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 황인숙 [강] 전문 -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살같은 단어들이다. 외롭고 괴롭고 미치고 침 튀기고 게다가 나한테 말하지 말고 눈도 마주치지 말자한다. 돌려서 말하지 못하고 울컥하는 주먹질같은 시라서 좋다. 화려한 형용사들로 꾸며진 삶은 겉보기만 반질할 뿐 그 속을 알 수 없다. 솔직하고 직접적인 모양새를 갖는 삶은 겉보기는 보잘것 없어도 겉과 속이 같다. 마음에 콱 와닿고 속이 후련한 글이다. 나도 너처럼 복장 터지니까 나한테 침도 튀기지 말고 눈도 마주치지 말자. 강에 가서 내지르는 지은이의 모습이, 아니 내 모습이 그려진다. 

찾아보니 2009년에 이 시를 읽고 좋아서 남긴 글이 있다. 지금은 그때보다는 마음이 정갈해져서 비통, 비참 등의 단어들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지금의 내가 더 좋다. 

- 신형철 [느낌의 공동체] 에서 황인숙의 [강]을 읽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