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별진 2018. 7. 18.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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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이애슬론 체형. 우리는 초가을 일요일의 소박한 레이스를 끝내고 각자의 집으로,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리고 다음 레이스를 대비해 각자의 장소에서 이제까지와 같이 묵묵히 연습을 계속해간다. 그런 인생을 옆에서 바라보면 별다른 의미도 없는 더 없이 무익한 것으로서, 또는 매우 효율이 좋지 않은 것으로서 비쳐진다고 해도, 또한 어쩔수 없는 일이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한다. 가령 그것이 실제로 바닥에 작은 구멍이 뚫린 낡은 냄비에 물을 붓는 것과 같은 허망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적어도 노력을 했다는 사실은 남는다. 효능이 있든 없든, 멋이 있든 없든, 결국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대부분의 경우, 눈에는 보이지 않는(그러나 마음으로는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진정으로 가치가 있는 것은 때때로 효율이 나쁜 행위를 통해서만이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공허한 행위가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어리석은 행위는 아닐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실감으로써, 그리고 경험칙으로써.

*하루키의 말이 편안하다. 작가의 삶의 태도인 것이다. 효율이 없어도 얻는 것이 없어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어쩔수 없다는 것은 단념이나 체념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그저 사는 것. 그 안에서 노력이란 것을 해보는 것. 거기서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얻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괜찮은 것이다. 

posted by 별진 2018. 7. 18. 23:04

<케빈에 대하여>를 보고 토론을 했다. 
틸다 스윈튼의 넋빠진 얼굴, 에즈라 밀러의 냉소적인 미소가 압권이다. 끔찍한 장면 없이 깔끔하게 많은 것을 보여주는 영화다. 멋지다. 
 
영화를 선정한 후 어떤 분은 애착관계에 대한 글을 보내셨고, 토론중 어떤 분은 케빈의 냉소에 기막혀 했다. 나는 모두 불편하다. 한 인격체의 형성에 대해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얼마나 될까? 일반적인 애착관계에 대한 설명들은 부모, 특히 엄마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진다. 

케빈의 냉소는 그 아이의 진짜 속마음이라기 보다 표현방법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케빈은 아직 어린 아이고, 엄마의 사랑에 대한 집착으로 속마음과는 반대되는 반항적인 표현을 하는거다. 이혼이야기 장면에서 케빈의 두려움 가득한 얼굴, 경찰차에서 끌려가면서 뒤돌아보는 공포에 휩싸인 얼굴, 교도소에서의 슬픈 얼굴 등이 케빈의 진짜 얼굴이다. 

케빈의 냉소도 무감하게 그려지는 에바때문이라고들 한다. 원하지 않는 임신과 육아에 지친 에바에게 휴식처는 없었다. 에바가 어떻게 무엇을 더 할 수 있었을까? 에바가 더할나위 없이 사랑으로 가득찬 엄마였다면 달랐을까? 에바는 그냥 보통 엄마다. 지독하게 운이 나쁜 엄마. 시간을 되돌린다면 그녀가 엄청난 희생과 사랑으로 케빈을 돌볼 수 있었을까? 엄마는 신이 아니다. 자신의 욕구가 있는 평범한 인간이다.

"Do not resist" 
케빈을 낳을때 산부인과 의사가 한 말이다. 저항하지 말라니.
영화를 보고 엄마의 모성애 결여가 잘못되었다고, 애착관계가 잘못 형성되어서 아이가 사이코패스가 되었다고 하는 해석이 많았다. 영화는 무책임하다. 해석을 모두 이렇게 맡겨버리다니. 나도 때때로 아이가 미울때가 있다. 그럴때면 '나는 엄마니까' '엄마가 그런소리 하면 안되지' 하며 다잡는다. 이건 모성본능일까? 아니면 학습된 모성일까?

싸이코패스, 소시오패스는 엄마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의 예를 들었더니, 저자가 후회하는 부분을 이야기 하신다. 과거로 거슬러 가면 원인이 될만한 모든 것들을 예방하고 제거할 수 있을까?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 다만 그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 최선이라는 것 역시 집착하고 매달려서 애쓰는 것보다 순간순간 할 수 있는 것들을 할 뿐이다. 

조금은 진보적인 사고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던 분들의 뿌리깊은 모성본능에 대한 사고에 조금 화가 난다. 내가 옳다고 주장하고 싶었다. 양육가설을 읽고 주장하고 싶어졌다. 이것도 600페이지가 넘는데 빌리고 말았다. 책이 너무 깨끗해서 실망이다.